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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癌 투병 아버지, 자폐증 아들과 600㎞를 걷다
특수학교를 졸업했지만 아들이 취업할 곳은 없었다 그를 돌볼 시설도 없었다
"이 현실을 세상에 알리자" 아버지는 부산서 서울까지 도보여행을 결심했다
출발 직전 암인 걸 알았다 그러나 포기할 순 없었다

비가 내린 7일 오전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 3번 국도(國道). 서울로 향하는 도로에서 우산을 든 두 남자가 손을 잡고 걷고 있었다. 그들 옆으로 화물트럭과 대형버스가 쌩쌩 달렸다.

"아빠, 먹고 싶어요. 산도, 초코맛…." 키 182㎝에 몸무게 104㎏. 덩치가 큰 열아홉 살 아들을 바라보던 아버지는 마치 아가를 보는 표정으로 활짝 웃고는 아들 입술에 뽀뽀를 했다.

손 꼭 잡고 - 7일 경기도 이천의 국도(國道)에서 아버지 이진섭씨와 자폐장애 1급인 아들 균도군이 서울을 향해 걷고 있다. 이진섭씨는“외로운 길을 둘이 걸어오면서 균도가 내게 큰 의지가 됐다”며“힘들어도 이 길을 떠나기로 선택했던 것이 참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아버지와 아들은 지난달 12일 부산을 출발해 27일째 이렇게 걸어왔다. 아버지 이진섭(47·자영업)씨가 자폐성 장애 1급인 아들 균도군을 데리고 먼 길을 떠나온 것이다. 목적지는 서울. 지난 2월 특수학교를 졸업한 균도씨가 직장을 얻지 못하자, "넓은 세상을 보자"고 아버지가 아들 손을 잡고 행군에 나섰다. 부산을 떠날 때 아버지는 직장암에 걸린 상태였다. 출발 3일 전 암진단을 받았지만 아버지는 부인에게만 이 사실을 알리고 그냥 출발했다. "45일 후에 꼭 돌아와 수술을 받겠다"고 의사에게 약속했다. 의사는 "운동하는 게 더 좋을 수도 있으니 무사히 다녀오시라"고 했다. 균도군도 아버지의 암을 모르고 있었다. 자폐성 장애 때문에 암이 무슨 병인지 모른다.

새까맣게 탄 부자가 잠시 비를 피하러 버스정류장 처마 아래 들어섰다. 양말을 벗으니 균도군 발은 물집투성이였다. 아빠가 연고를 발라주며 물었다.

"균도야, 우리 지금 어디 가지?"

"우리 서울 가요!"

부자(父子)의 도전

아버지와 아들은 부산에서 서울까지 총 600㎞를 걷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최단거리로 이으면 390㎞ 거리지만 지방국도를 타고 올라가는 데다 중간 중간 덜 위험한 길로 돌아가다 보니 거리가 늘었다. 이 중 벌써 500㎞쯤 왔으니 고지가 눈앞이다. 12일 서울에 도착해 국회와 청와대를 들른 뒤 서울을 한 바퀴 돌아 20일 장애인의 날 기념식에 참석하고 부산 집으로 돌아갈 계획이다.

멀고 험난한 길을 가기로 결심한 것은 지난 2월. 학교를 졸업한 균도군이 당장 갈 곳이 없자 부모는 절망에 빠졌다. 성인 발달장애인들을 낮 동안 맡아주는 보호시설도, 이들을 취직시켜주는 이른바 '사회적 기업'도 "꽉 차서 자리가 없으니 무한정 기다려보라"는 말뿐이었다. "이런 현실을 정치인과 공무원들이 모르고 있다면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날마다 좁은 공간에만 갇혀 있는 아들에게 '네가 살아갈 땅 대한민국이 이렇게 넓은 곳'이라는 것을 몸에 입력시켜주고 싶었습니다."

아버지는 준비운동도 하고 코스 답사도 다녀오면서 모든 준비를 마쳤다. 이제 출발만 하면 되는데, 병원에서 건강검진 결과가 나왔다. 직장암이었다.

초기니까 수술하면 낫는다고 의사는 말했지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을 어쩔 수 없었다. "이 손을 놓아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잠든 아들의 손을 잡고 아버지는 밤새 울었다.

모든 일정을 취소했던 아버지는 출발 하루 전, 마음을 바꿔 먹었다. "초기가 아니라 말기라도 나는 간다고 큰소리쳤어요. 내가 아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장애를 갖고도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사회적 여건을 바꿔주는 것밖엔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까요."

좌절

서울로 향하는 길에 둘은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정치인과 공무원들을 만나려고 애썼다. 경북 구미시청, 상주시청, 경남 밀양시청, 대구광역시의회 등을 찾아가 부시장, 복지담당 공무원, 시의원들을 만났다.

아버지는 호소했다. "주간보호시설에 자리가 없어서 이 아이들이 갈 데가 없습니다. 예산을 늘려서 턱없이 모자라는 자리를 늘려주십시오." "이 아이들 취업문제를 생각해주십시오. 대기업에서 이 아이들 고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장애가족들의 고통을 아십니까. 이혼율이 30%를 넘습니다. 국가에서 최소한의 시간만이라도 맡아주십시오." "발달장애인법이나 장애아동지원법이 만들어지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지자체에서 조례로라도 지원을 좀 서둘러 주십시오."

그러나 돌아오는 말들은 한결같았다. "알긴 아는데 시 재정이 너무 없다" "상위법이 없어서 힘들다" "이해는 한다. 노력은 하겠다" "신경을 쓰겠다"…. 심지어 어느 시청의 복지담당 국장은 "자폐아를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라며 신기해하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이진섭씨와 아들 균도군이 7일 밤 경기도 광주의 여관에서 물집이 생긴 발을 보여주고 있다.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희망

관청에서 맞닥뜨린 현실은 차가웠지만, 길에서 만난 사회는 그래도 따뜻했다. 아버지는 밥을 먹을 때마다 일부러 사람이 가장 많은 식당을 골라 들어갔다. 균도군이 소리를 지르거나 돌아다니면 다른 손님들이 싫은 내색을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런 아이도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사회는 잘난 사람들끼리만 사는 곳이 아니라 못난 사람도 함께 가는 곳이라는 걸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음료수와 과자를 사주고 물수건을 넉넉히 챙겨주는 식당 아주머니들, 길 가다 차를 세우고 "우리 애도 장애인이다. 미안하고 고맙다"며 돈 몇만원을 쥐어주고 황급히 사라지는 아저씨들도 수십 명이 됐다. 아버지는 "먼 길을 가면서 그래도 이 사회가 고맙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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