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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어찌어찌하여 중학교를 무사히 마치고 경기도 의왕에 있는 우성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아버지가 목수 일을 하시고 어머니가 여러 가지 부업을 하신 관계로 밥은 굶지 않았지만 수업료는 잘 내지 못했다.

공부를 잘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대학에는 다니고 싶었고. 할 수만 있다면 대학에서 정치를 공부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공부는 잘 안 되고 성적도 지지부진한데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마저 식도암으로 앓아 누우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그도 대학에 가지 못했다. 그렇다고 일자리를 찾지도 않은 채 그냥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를 먼저 보낸 후유증인지 2년 만에 어머니까지 돌아가셨다.

그는 아무도 없는 혼자가 되었다. 형과 누나들은 이미 결혼을 했고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그는 갈 곳이 없었던 것이다. 그가 홀로 되자 형님이 자신의 집으로 그를 데려갔다.

“형수와 조카들도 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염치없이 형님 집에서 몇 년씩이나 살았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저 방안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며 가슴앓이로 세월만 갉아 먹고 있었다. 형수님 눈칫밥을 얻어먹는 것도 죄스러웠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해서 더 애가 탔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라디오에서 장애인에게 컴퓨터를 가르치는 곳이 있다고 했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에 장애인등록을 했는데 시각장애는 5급이고, 지체장애는 3급이었다. 담양에 있는 덕산직업전문학교(현 혜림직업전문학교)에서 2년간 컴퓨터를 배웠다. 한쪽 눈은 실명상태이고 다른 한쪽 눈도 잘 보이지 않으므로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 소프트웨어 프로그램 등을 공부했다.


“뭘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니까 공부도 재미가 있었어요.”

그래서 학교생활도 잘 했고 성적도 4.0이상이었으나 막상 졸업을 하고 나니 갈 곳이 마땅치가 않았다. 또 다시 백수가 될 판이어서 시간이 날 때면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에서 운영하는 재활통신망 ‘넓은마을’에 들어갔다.

가끔은 ‘넒은마을’에서 남의 얘기도 듣고 자신의 얘기를 하기도 했는데 그러다가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 사람은 시각장애 1급으로 안마를 하는 사람이었는데 그의 고민을 잘 들어 주었으며 대화를 나눌수록 마음이 통하는 것 같았단다.

그러나 ‘넓은마을’에서 만난 김나연(1973년생)씨는 부산에 살고 있었고 여승현 씨는 집이 경기도 군포였다. 그래도 둘이 만날 인연이었는지 마침 여승현 씨가 부산 괴정에 사는 큰어머니 집에 갈 일이 생겼다. 그렇게 해서 둘은 만났는데 여승현 씨가 장래 직업에 대해 고민이 많다고 하자 김나연 씨는 공부를 좀 더 해서 공무원이 되는 것은 어떠냐고 했다.

당시에는 김나연 씨도 여러 가지 사정으로 곤경에 처해 있을 때여서 둘은 서로의 고민을 이해하면서 외로움을 달래줬고 그것이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돌파구가 되었다. <3편에 계속>

* 이 내용은 문화저널21(www.mhj21.com)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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